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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 (페리 록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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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09:40:09

- 페리 록우드 / 이강진 역

 

 

 

1. 들어가기에 앞서

 
 



"사람이 보기에는 바른 길들이라도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하느니라"(잠언 14:12).

사람이 만든 구원의 길은, 비록 사람에게 옳게 보일지라도, 결국은 사망과 지옥에 이르게 합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생명과 하늘에 이르게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길"을 따라가는 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3절은 "그 무렵 이 도(道)에 대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표현이 사도행전 9장 2절, 16장 17절, 18장 25,26절, 19장 9절, 22장 4절, 24장 14,22절에서도 발견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길로 이어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좋은 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고안한 많은 종교체제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명의 길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성경에 "화평의 길"(로마서 3:17), "진리의 길"(베드로후서 2:2), "의의 길" (베드로후서 2:21), "주님의 도(道)"와 "하나님의 도(道)"(사도행전 18:25,26)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화평과 진리, 그리고 의로 특징지어지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하느니라(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합니다. 사람이 만든 구원의 길은 옳게 보일 수 있으나 사망과 지옥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날 혼란을 초래하는 많은 길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죄들의 용서와 "집"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다양한 주의 주장과 이단종파 그리고 인본주의적 철학에 현혹된 많은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속이는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 제도나 고행이나 선행이나 새로운 신학을 주창하는 종교의 길이 있고, 고상한 인품이나 인격수양이나 자아혁신이나 "가장 선한 행동"을 주창하는 도덕의 길이 있으며, 전통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도 단 하나뿐인 참되고 살아 있는 그 길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어느 길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입니다. 해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와 자신의 길을 성경에 계시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성경이 최종권위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만한 생명의 길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존재 자체가 심히 모순되고 상충하는 존재는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일한 인도자와 권위로 삼는 자들만이 화평과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길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은 모든 죄인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차이가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2,23)라고 하였고,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망이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것과 지옥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지옥이란 주제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설교를 듣던 한 여인이 언짢은 기분으로 예배 후에 그에게 찾아와 "목사님은 자녀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여인은 다시 "그들을 사랑합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물론이지요. 무척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여인은 "그렇다면 좋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한 아버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설교자가 "그를 폭군이요 괴물이라 말하고 싶군요." 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바로 당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지옥에 보내신다면 괴물일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설교자가 답변하기를, "하지만 자매님은 한 가지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녀도 지옥에 보내지 아니하시며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 있거나 그곳에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인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설교자가 옳았습니다. 사람은 죄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누구나 - 그가 그 사실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 지옥에 가게 됩니다.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불은 탑니다.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독은 죽입니다.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서리는 업니다.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지구는 둥급니다.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지옥은 있으며,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구주(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당신의 죄들을 간직한 채 죽는다면, 당신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당신은 그곳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의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분을 모셔들이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

 


13절에서 우리는 신적인 면, 곧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통으로나 사람의 가계나 자연적 번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유다인들(유태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연적 후손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잘못을 범하였는데,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 6,7절에서 이러한 생각이 허망한 것임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자녀가 아니니라."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나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와 구원은 핏줄 속에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부모라도 죄 없는 자녀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우리는 혈통으로 하나님의 가정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육신의 뜻"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의 결과가 아닙니다. 아이가 특별한 가정에 태어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습니다. 인기가 높거나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고 해서 외국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에서 태어나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출생이나 스스로의 결정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왕국 안으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다." 구원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뜻과는 무관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조합이나 동아리나 교회모임이나 기타 사회단체의 구성원으로 삼을 수 있으나, 나를 하나님 가정의 구성원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OF GOD) 태어난 자들이니라."

 


구원은 100 퍼센트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정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권능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직 피 흘리심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면이 있을 수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참 모습입니다. 유월절 그 밤,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문에 발라졌을 때에 처음 난 것들(初胎生)의 생명이 보존되었습니다.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자신의 피를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흘리셨을 때에, 대속(代贖)의 값을 지불하셨고 죄들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피로 보호하심을 받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집 안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스톤웰 잭슨 장군은 버지니아주의 세난도아 계곡에서 야영을 하였는데, 남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정확한 암호를 대지 않고는 아무도 방어선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자정 무렵 부상당한 불쌍한 북군 병사 하나가 방어선에 다가오자 보초가 정지를 명하였습니다. 보초는 암호를 대라고 하면서 대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젊은이는 온 종일 진지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암호를 몰랐습니다. 죽음이 닥친 것을 느끼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것을 떠올리고서 "피, 피"라고 외쳤습니다. 그 때에 보초가 "가도 좋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피가 그날 밤의 암호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문에 도착하였을 때의 암호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거듭나야만 합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첫째,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로마서 10:17).
당신은 오늘 복음을 들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가책이 있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였을 때에, 군중들은 죄에 대한 가책을 받고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외쳤습니다(사도행전 2:37).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있었을 때에, 간수가 죄에 대한 가책을 받고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16:30).

 


셋째,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는 죄 또는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현 관계에 대하여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경건한 슬픔입니다. 죄를 회개하기 전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넷째,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모셔들이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믿는 것은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모셔들이지 않으면, 진정으로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그분을 개인적으로 모셔들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알거나 그것들이 진실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있다고 해서 배고픔이나 굶주림에서 구원받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반드시 손을 뻗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모셔들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BECOME). 우리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모셔들였습니까?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리스도를 모셔들일 때에 상황이 어떠하였습니까? 만일 아직 그분께 가지 아니하였다면, 당신이 죄들을 회개하고 마음에 그분을 믿음으로 모셔들일 때에 그분께서는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2. 믿음의 길



신약성경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는 첫 번째 단어인 "의인"이 믿음에 의한 칭의(稱義)로서 강조되고 있고,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는 두 번째 단어인 "믿음으로"가 강조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서는 세 번째 단어인 "살리라"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믿음의 사용을 조건으로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연결하며 그분을 삶의 현장에 모셔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첫 날부터 이곳에서 우리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다고 칭해집니다. 거룩함과 영적 성숙은 믿음에 의하여 현실화되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이나 투쟁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도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너희가 이토록 어리석으냐?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으로 완전해졌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선포한 말씀을 믿고서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였는데, 이제 와서 외적인 의식들과 육신의 행위들을 지켜서 완전함을 얻으려고 할 정도로 그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나아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있어서 모든 진보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분을 기쁘시게 함이 불가능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한 그분께서 자신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기서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우리 앞에 던져집니다. 그 해답은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발견됩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서(證書)니라."

 


믿음은 먼저 보이지 않은 것들을 실제적으로 인식하는 감각으로 설명됩니다. 믿음의 증서는 사실들 위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영원한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고린도전서 15:1-4).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서"(고린도전서 16:13), "걷고"(고린도후서 5:7), "사는"(갈라디아서 2:20) 그 믿음인 것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닻을 내리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인상들(IMPRESSIONS)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죠지 밀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상들은 어떤 면으로도 믿음과 관련이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강하건 약하건 인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기록된 말씀과 관련이 있고 우리 자신들이나 우리의 인상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가능성들(PROBABILITIES)이 부각되어서도 안 됩니다. 죠지 밀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들을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가능성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믿음의 영역은 가능성들이 없어지고 보고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겉모습들 (APPEARANCES)이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경 안에서 말씀하셨는지 아닌지이다."

 


제임스 맥콘키는 이렇게 썼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DEPENDENCE)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끝날 때에 시작된다. 우리 대부분이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은 슬픔, 고통, 고난, 좌절, 절망 등으로 자신이 무력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이다. 비로소 그 때에 우리는 믿음의 교훈을 배우고, 육체적인 힘과 자기를 의지하던 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생명과 권능과 사역의 복된 승리를 향하여 한 작은 생명의 배가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죠지 밀러의 말을 한 마디 더 들어봅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신 것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보증한다." 죠지 밀러의 삶은 이 말을 강력하게 확증하는 삶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들이 진실됨을 믿는 것이요
그분께서 주시는 것을 기쁘게 받는 것이요
그것이 당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 것이라.

 


믿음이란 무엇인가?

 


전능하신 분을 단순히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요
모든 무거운 짐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요
오직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

 


안식이란 무엇인가?

 


영원하신 팔에 안기는 믿음이요
의심이 사라지고 무거운 짐이 없어지며
재앙이 휘몰아쳐도 온전히 평안함이라.

 


한 어린이가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큰 소리로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어린이는 옳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어떠한 사실들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실들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시험의 때가 임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의 처음 네 절은 우리가 어떻게 시련을 승리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유혹과 시험이 닥치자, 그들 가운데 몇 사람들은 그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외적인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허락된 것이므로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유혹"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부딪히는 시험들을 말합니다. 그것들을 비통한 심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취하는 것과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대가를 지불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우리의 시련은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완성된 성격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전체가 완전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3,4).

 


한 어린이가 아저씨네 농장에 방문하기로 하는 약속을 받았는데, 그 어린이에게는 그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수차 되풀이하여 "엄마, 언제 갈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얘야, 참고 기다리렴!"하고 대답하자, 어린이는 "엄마, 난 기다릴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지친 엄마가 "그럼 좋다. 기다리지 말아라!" 당황한 어린이는 자기 어머니를 쳐다보며 "난 몰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서두릅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인내를 길러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자기의 삶에서 인내를 충분히 이루는 것은 성도의 책임입니다.

 


야고보서는 1장 5-8절에서 "믿음의 기도"를, 9-12절에서 "믿음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날마다의 삶에 얼마나 지혜가 필요합니까! 어쩌면 당신은 지금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중요한 결정을 하여야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초청하여 "믿음의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구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믿음은 선물로 여겨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여기서 믿음은 우리가 성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로마서 10:17).

 


허드슨 테일러는 마가복음 11장 22절의 "하나님을 믿으라."는 구절을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교사는 그 말씀을 자신의 날마다의 삶에 반복하여 적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하나님을 믿으라고만 요구받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믿음의 창조자입니다. 만일 사람이 의사를 믿으면, 그 믿음의 창조자는 그 의사입니다. 만일 사람이 변호사를 믿으면, 그 믿음의 창조자는 그 변호사입니다. 만일 사람이 은행을 믿으면, 그 믿음의 창조자는 그 은행가입니다. 만일 사람이 친구를 믿으면, 그 믿음의 창조자는 그 친구입니다. 그 의사나 변호사나 은행가나 친구를 떠나서는 어떠한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것도 믿지 않는 그런 믿음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 믿음은 자신의 귀한 성경 안에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히브리서 12:2).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우리의 믿음 곧 나의 믿음을 그분의 믿음을 위하여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특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장하여야 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성경에 대해 많이 알수록 성장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사용함으로써 성장합니다. 어떤 이가 죠지 밀러에게 편지하며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믿음이 아주 연약하고 희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죠지 밀러가 이렇게 답장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시련과 친지의 죽음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사용되고 성장하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정을 가지고 역경들을 허락하심으로써 점점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 의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제련해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믿는 것, 무력함 아니네.
마음과 혼을 사로잡는 환희이네.
감각을 순수하고 예민케 하며
지성과 절제를 비추네.
예수님 믿는 것, 과학의 열매 아니네.
인간 지성은 강하여도 실패하네.
지혜의 창시자 우리를 살피시니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보상받네.
예수님 믿는 것, 복종함이네.
어려움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 말씀 즐겨 들으며
우리의 어두움 그분의 빛에 넘겨드리네.
"믿을 수 없다. 느낌이 없다." 말하지 말게
느낌이 아니니, 하나님 말씀은 진리이네.
그대, 사랑하는 자의 말을 자주 듣거늘
전능하신 하나님, 그대에게 말씀 주시네.

 

 

 

3. 교제의 삶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린도전서 1:9).

 


일단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온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죄 많은 사람과 사귈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代贖)에 의하여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보리에서 우리의 죄를 다루셨기에, 거기에서 우리를 만나실 수 있고 만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에 의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가졌나니, 곧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별해 놓으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베일, 곧 그분의 육체를 통과하여 들어가느니라.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성직자께서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이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자 "(히브리서 10:19-22).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성직자가 계시니, 하늘들 안으로 통과하여 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고백하는 바를 굳게 붙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성직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시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시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하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4-16).

 


고든 박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함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아들의 신분은 바꿀 수 없으나 교제는 변한다. 아들의 신분은 절대적이나 교제는 단계적이다. 가장 고상한 성도도 가장 연약한 신자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 이 둘의 차이는 교제의 차이일 뿐 타고난 권리의 차이는 아니다. 우리는 아들의 신분에서 생명을 얻고, 교제에서 풍성한 생명을 얻는다. 아들의 신분에서 그 사랑하시는 분 안에 받아들여지는 지위를 얻고, 교제에서 성령님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권능을 얻는다. 아들의 신분에 구원이 달려 있고, 교제에 거룩함이 달려 있다."

 


날마다 반드시 하나님과 교제하여야 합니다. 홀로 그분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이같이 귀중한 특권을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육체와 마귀와 싸워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첫째, 죄를 경계하여 교제를 끊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어두움에서 걷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빛을 누릴 수 없습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 놓습니다. 죄가 고백되고 포기되는 즉시 우리의 교제는 회복됩니다. 요한일서 1장 7-9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가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끊임없이 고백하고 포기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와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베드로후서 3:18).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베드로전서 2:2).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숙되고 믿음 안에서 연륜이 쌓이면 단단한 음식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은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되어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당신을 "육체가 되신 말씀"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둘을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결합시키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19:6).

 


무디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죄는 당신을 성경에서 떼어놓고, 성경은 당신을 죄에서 떼어놓을 것입니다." 이것은 100년 전에도 진리였고 오늘날에도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성경번역본들은 성경의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막대한 노력을 들여, 단어나 절들을 없애고 또 진리를 파괴하는 변조된 구절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이 영원토록 하늘에 확정되었나이다"(시편 119:89).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

 


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영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오늘날까지 보존하신 것을 믿습니다. 시편 12편 6,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 오 주여, 주께서 그들을 지키시나니, 그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보존하실 것입니다."

 

 

 

지난 수 백년 동안 성경을 파괴하기 위하여 많은 수단방법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악한 사람들은 자유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거짓된 번역본들을 통하여 여전히 성경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굳건히 서 있습니다! 지브롤터 해협의 바위에 1분마다 수백만 리터의 물이 부딪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서 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백만의 불신자들과 신복음주의자들이 힘껏 성경을 공격하였지만, 성경은 그대로 서 있고 그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나는 어느 날 대장간 문가에 서 있다가
모루가 저녁 예배의 종처럼 울리는 것을 들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에 보이는 것은
여러 해 두드려 다 닳은 오래된 망치들이었다.
"저 망치들을 모두 닳게 하는데 모루가 몇 개나 들었나요?"
내가 묻자 대장장이가 말했다. "단 하나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루가 당신이 알고 있는 망치들을 다 닳게 할 것 입니다."
그러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루와 같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동안 회의론자들이 맹렬히 두들겼지만
두드리는 소음만 들릴 뿐
모루는 변하지 않았고 망치들은 사라졌다.

셋째,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기도는 진리가 가득한 보물창고의 문을 엽니다. 시편 119편 18절은 말씀합니다.

 


"주여,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의 법에서 놀라운 일들을 보게 하소서."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보물창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꺼내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을 가져오사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을 펼치는 것입니다. 펼친 성경을 손에 들고,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서 기다리면,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받을만한 뜻이 계시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세상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기도는 당신의 마음을 죄와 근심에서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요청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 4:6).

 


이것이 염려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입니다! 그분의 뜻은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그분 앞에 당신의 짐과 인생의 어려움들을 내려놓으십시오.

 


"너희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베드로전서 5:7).

 


기도는 봉인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여는 도구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발견할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공급될 것입니다.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십시오. 그분을 완전히 믿음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오.

 


한 어린이가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가 "아빠,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어요?" 하고 묻자, 아버지는 "얘야, 왜 그런 걸 물어보니?" 하고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왜냐면요, 요즘엔 아빠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해서요." 이 말에 그 아버지는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어떻게 기도하였는지 기억하십니까? 날마다 주님과 교제를 하고 있습니까?

 


오, 우리는 왜 자주 화평을 잃어버리는가.
오, 우리는 왜 불필요한 고통을 겪는가.
기도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기 때문이라네.

 


남다른 한 시골 전도자가 마을의 집들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한 멋진 집에 이르렀을 때에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문을 두드려 여주인이 응답하자 그는 "아주머니, 여기 예수님께서 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주인은 깜짝 놀라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재차 물었으나 여주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날 밤 여주인은 남편에서 이 놀라운 경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지 그랬어?"하고 묻자, 여주인은 "아니요. 그는 그걸 묻지 않았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편이 다시 "그러면 교회에 헌금을 한다고 말하지 그랬어?"하고 묻자, 여주인은 "아니요. 그는 그런 것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단지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사시는지를 알고 싶어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에 살고 계십니까?" 당신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기도하면서 그분과 교제를 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과 끊임없이 교제를 유지하고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4. 분리의 삶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분리되라, 주가 말하노라. 또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맞아들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들과 딸들이 되리라, 전능하신 주가 말하노라"(고린도후서 6:17,18).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선언한 뒤에(11-13절), 바울은 그들 주위에 있는 이방인 세상에 속한 모든 범죄와 더러움으로부터 분리되라고 호소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죄악으로부터 분리를 실천하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현대 복음주의적인 지도자들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로부터 분리되어 그분의 분리된 백성을 이끌어 파라오의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모세가 오늘날의 많은 지도자들 같았다면 이렇게 따졌을 것입니다. "이집트에 스며드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파라오의 궁궐에 머무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분리보다 대화와 협력이 결국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지 않을까요? 사람들을 구원하고 더 많은 이들을 복음집회에 참석시키는데 있어서 타협이 더 큰 결실을 맺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를 희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히브리서 11장 24, 27절을 읽어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성년이 되어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으며"

 


신명기 22장 9-11절은 이스라엘이 순수한 증거를 지키는데 있어서 두 번째로 큰 시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서로 다른 종자들"이나 혼합된 씨들을 뿌리는 것을 금하시고 그리하면 땅이 더러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털과 아마를 섞어 짠" 옷은 마음을 더럽히는 혼합된 가르침, 신자와 불신자의 혼합된 예배,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혼합된 행동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오늘날의 혼합된 행동양식 곧 성경과 정치, 성경과 심리학, 성경과 철학, 그리고 설교단에서 나와 복음을 변질시키는 모든 혼합물들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7장 8절에서 대언자는 에브라임을 잘 혼합되는 자라고 말한 다음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빵이니라."고 하십니다. "뒤집지 않은" 빵은 반만 구워진 빵입니다. 그러한 빵은 맛도 없을 뿐더러 입맛이 당기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무언가 부족한 태도나 행동들을 가리키는데, 오늘날 기독교계의 많은 사역에 있어서 슬픈 현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이 되기에는 "반만 구워진"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살펴보고 "기독교 신앙이 그와 같다면,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자신이 살던 사회의 죄악에 대하여 외쳤듯이, 하나님의 백성도 자주 현 사회의 죄악에 대하여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시대에 타협을 불쾌히 여기셨듯이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성경적 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43절은 "그분으로 인하여 백성 가운데 분열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구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최고수준의 삶" 237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태복음을 공부하다 보면 주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의로 거절한 사람들과 분명하게 또 의도적으로 분리하신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분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분은 그들로부터 물러나신 뒤 그 때부터 자신을 전적으로 자신께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셨다."

 


이것이 참된 성경적 분리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편리한 통합주의(예:교회연합운동)가 예수님을 본보기로 주장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는 그분의 사역이 분리하는 사역이요 결국 죽음에 넘겨지는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통합주의자는 만일 그분께서 더 현명하고 건설적이었더라면 또한 덜 논쟁적이었다면, 그렇게 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 및 다른 종교단체들과 함께 하는 기도모임과 복음집회, 또 교회일치와 신유은사를 위한 모임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함께 하는 그 사람들이 구원받았는지 여부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원수들과 연합하지 않고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고 선포한 것을 보게 됩니다(사도행전 2:23). 이것은 결코 종교적 통합을 촉진할 의도가 아닌 것입니다. 현대 신복음주의자들은 배도한 지도자들에 대해 단호한 판결을 촉구하는 설교를 찬성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사도들이 지혜롭지 못했다고 하거나 그들을 종교적 분열을 조장한 혐의로 고소하려고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을 읽어봅시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성직자들과 성전경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다가와,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선포하므로 근심이 되어, 그들을 체포하여 다음날까지 가두었으니, 이는 이미 저녁 무렵이 되었음이라."

 


오늘날 우리는 과격분자로 여겨지지 않도록 분리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낮출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죤 브래드베리는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세상과 사탄의 종들 곧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들로부터의 분리이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리되어야 한다."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는 고(故) 라일 감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명받은 사역자나 복음전도자가 말하는 것이라면 신앙 가운데 무엇이든지 믿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성직자도 평신도처럼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성직자들의 가르침은 반드시 성경의 저울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들의 교리가 성경과 일치하는 한 믿고 따라야 하며 거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앞서 본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혼합된 곳에서 나오도록 명령하십니다. 믿는 자들이 거짓 대언자들과 교제를 나누거나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조장하는 것입니다. 참 교리와 거짓 교리가 같은 설교단에서 선포될 수 있다거나, 주님의 일에 드려진 돈이 참과 거짓 모두를 돕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리라는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러한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늘날 분리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신복음주의적인 집회나 대회나 다른 행사들에 참석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무디 형제여, 오늘날 당신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무디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나니, 나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그분의 속죄를 비웃는 사람과는 내가 결코 교제하지 않으리라."

 


빌리 선데이 형제여, 당신의 노선은 무엇입니까?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회심한 모든 자들이 과감하게 성경의 영감을 거부하는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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